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스 크렙스 (문단 편집) ===== 중부집단군 참모장 ===== 제1차 르제프 전투에서의 전공으로 소장으로 진급한 크렙스는 1943년 3월, 중부집단군 참모장으로 영전하며 중장으로 진급한다. 오랜 시간 주재 무관으로 근무한데다가 야전 지휘관 경험이 없고, 군사적 배경이 없는 평민 출신임에도 크렙스의 진급 속도는 이례적으로 빠른 편이었다. 역시 진급 속도가 빠르고 크렙스처럼 최종 계급이 대장이었던 [[핫소 폰 만토이펠]]조차 크렙스보다 한 살 많은 나이에 200년이 넘게 프로이센 군인을 배출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고 야전 지휘관으로 전공을 다수 올렸다. 그만큼 크렙스는 당대에 인정받는 참모장이었다. [[파일:1943년 스몰렌스크 중부집단군.jpg|width=750]] ||1943년 3월 13일 스몰렌스크에서 히틀러의 사열을 받고 있는 중부집단군의 장성들. 히틀러의 왼편에 [[귄터 폰 클루게]] 원수. 왼쪽부터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상급대장, [[발터 모델]] 상급대장,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상급대장, 발터 바이스 보병대장, 한스 크렙스 중장.||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 원수도 활동형 지휘관이어서 사령부를 자주 비웠는지, 쿠르스크-오렐 전투에서도 9군 사령관 모델이 중부집단군 사령부와 통화할 때 그 통화 상대는 크렙스였다. 기존 전사 서적의 부실한 자료와 달리, 최신 전사 서적들은 1차 사료인 당대 독일군 통화 기록을 상당수 반영하고 있는데 그 상당수의 통화 기록에서 크렙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귄터 폰 클루게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예비역으로 편입된 후, 9군 사령관 모델도 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을 앞두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고국으로 돌아가 있는 동안 크렙스는 신임 중부 집단군 사령관 [[에른스트 부슈 ]]원수와 호흡을 맞춘다. 그리고 운명의 1944년 6월 22일,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고 초기 대응에 실패한 부슈 원수는 해임, 북 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모델 원수가 중부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며 크렙스는 오랜 상관과 또다시 위기 상황에서 재회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